샤를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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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7세는 1403년에 태어나 1461년에 사망한 프랑스 왕국의 국왕으로, 백년 전쟁 시기에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는 프랑스 왕세자 시절 부르고뉴파의 위협을 피해 도망쳤으나, 잔 다르크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여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샤를 7세는 로마 시대 이후 프랑스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하고, 부르주 프라그마틱 칙령을 통해 교황권으로부터 권력을 확보하는 등 프랑스를 재건했다. 그러나 잔 다르크를 방치하여 죽게 한 점과 아들 루이 11세와의 갈등은 그의 통치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낳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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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7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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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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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승리왕 |
재위 | 1422년 10월 21일 – 1461년 7월 22일 |
대관식 | 1429년 7월 17일 |
선임자 | 샤를 6세 |
후임자 | 루이 11세 |
섭정 | 헨리 6세 (1422–53년) |
배우자 | 마리 드 앙주 (1422년 결혼) |
자녀 | 루이 11세 라데공드 드 발루아 카트린, 샤를 백작 부인 욜란드, 사보이 여공작 잔, 부르봉 여공작 마들렌, 비아나 공주 샤를, 베리 공작 서자: 마리, 탈부르 백작 부인 샤를로트, 몰레비에 백작 부인 |
왕가 | 발루아 가문 |
아버지 | 샤를 6세 |
어머니 | 이자보 드 바비에르 |
출생일 | 1403년 2월 22일 |
출생지 | 파리 |
사망일 | 1461년 7월 22일 |
사망지 | 뫼앵쉬르예브르 |
매장일 | 1461년 8월 7일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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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샤를 7세는 생폴 호텔(Hôtel Saint-Pol)에서 태어나 1403년 생후 6개월 만에 퐁티외 백작(Count of Ponthieu) 작위를 받았다.[1] 그는 샤를 6세(Charles VI of France)와 바바리아의 이자보(Isabeau of Bavaria)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2] 그의 형들은 모두 프랑스 왕세자(Dauphin of France)였으나 자녀 없이 사망하여 샤를이 작위를 상속받았다.[2]
당시 프랑스는 부르고뉴파와 알마냐크파 간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웠고, 1415년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고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샤를은 형들의 사망으로 왕세자가 되었으나,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장악하자 부르주로 피신했다. 1419년 장 1세와 화해를 시도했으나, 협상 중 왕세자 지지자들이 장 1세를 암살하면서 필리프 3세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트루아 조약을 통해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 샤를은 왕위 계승권을 부정당하고, 어머니 이자보로부터 친자가 아니라는 의심까지 받으며 정통성에 대한 고민을 했다.[1]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는 헨리 5세에게 넘어갈 상황이었으나,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1422년 사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프랑스인들은 샤를을 지지하며 헨리 6세의 왕위 계승을 부정했다.[1]
젊은 시절 샤를은 용맹한 지도자였으나,[1] 잉글랜드군을 몰아내지 못하고 루아르 강 남쪽에 머물며 '부르주 왕'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2] 1422년 앙주의 마리와 결혼했다.[1]
1428년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잉글랜드군을 격퇴하고, 1429년 랭스에서 정식으로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후 잔 다르크와 갈등을 빚었고,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히자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방치하여 그녀가 화형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3]
잔 다르크 사후, 샤를 7세는 잉글랜드에 대한 강경책을 유지하며 영토 회복에 힘썼다.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부르고뉴와 화해하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시켰다.[1] 1453년 카스티용 전투 승리로 백년전쟁을 종식시키고 '승리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전후에는 폐허가 된 도시 복구와 왕권 강화에 힘썼으나, 1461년 사망했다. 말년에는 아들 루이 11세와 대립했으며, 1456년 잔 다르크 복권 재판을 통해 잔 다르크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했다.
2. 1. 초기 생애
생폴 호텔(Hôtel Saint-Pol)에서 태어난 샤를은 1403년 출생 6개월 후 퐁티외 백작(Count of Ponthieu) 작위를 받았다.[1] 그는 샤를 6세(Charles VI of France)와 바바리아의 이자보(Isabeau of Bavaria)의 열한 번째 자녀이자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2] 그의 네 명의 형인 샤를(1386년), 샤를(1392~1401년), 기옌 공작 루이(Louis, Duke of Guyenne)(1397~1415년), 투렌 공작 장(John, Duke of Touraine)(1398~1417년)은 모두 프랑스 왕세자(Dauphin of France)이자 프랑스 왕위 왕위 계승자(Heir apparent)였다.[2]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녀 없이 사망하여 샤를이 풍부한 작위를 상속받게 되었다.[2]당시 프랑스는 부르고뉴파와 갈리카니즘을 표방하는 알마냐크파 간의 내전 상태였으며, 양 파는 국왕과 왕족의 확보 및 파리 지배를 놓고 끊임없이 다투고 있었다. 1415년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는 이 기회를 틈타 프랑스를 침공, 아쟁쿠르 전투에서 알마냐크파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군을 대파하고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샤를의 형인 왕세자(도팽) 루이는 1415년에, 뒤를 이은 왕세자 장은 1417년에 사망했다. 새로 왕세자가 된 샤를은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장악하자 프랑스 남부 부르주로 도망쳤다. 1438년 7월, 샤를 7세는 부르주에서 갈리카니즘에 기반한 「부르주 국사조서」를 발표했다.
1419년 왕세자 샤를과 부르고뉴 공 장 1세(용맹공)는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공동으로 싸우기 위해 화해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협상 자리에서 왕세자의 지지자가 용맹공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뒤를 이은 필리프 3세(선량공)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왕세자 샤를과 전면적으로 대립, 트루아 조약을 통해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 이 조약은 왕세자 샤를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고, 샤를 6세 사후에는 샤를 6세의 딸 카트린(캐서린)과 결혼한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카트린과 샤를 7세의 어머니 이자보는 샤를이 왕의 친자가 아님을 암시했다고 전해지며, 이후 샤를은 자신이 정통 왕의 자식이 아닌지, 혹은 광인의 자식인지 고민했다고 한다.
2. 2. 도팽 시절
도팽 시절, 샤를은 자신의 상속권에 대한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1418년 5월 29일, 부르고뉴 공작 장공의 지지자들이 파리에 입성하자 샤를은 파리에서 도망쳐야 했다.[1] 1419년, 샤를은 부르주에 자신의 궁정을, 푸아티에에 의회를 설립했다.[2] 같은 해 7월 11일, 샤를과 장공은 멜랑 근처 푸이이르포르에서 푸이이르포르 조약을 맺고 화해를 시도했다. 이 조약에서 그들은 정부 권한을 공유하고, 서로 도우며, 상대방 동의 없이 어떤 조약도 체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3]샤를과 장공은 1419년 9월 10일 몽테로-포-욘의 다리에서 다시 만났다.[4] 장공은 회의가 평화롭고 외교적일 것이라 생각해 소규모 호위대만 데리고 왔으나, 도팽의 사람들은 장공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샤를의 개입 정도는 불확실하다. 그는 자신의 사람들의 의도를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기 어려워했다.[5] 이 암살로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화해 시도는 끝났고, 잉글랜드의 헨리 5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샤를은 나중에 장공의 아들 필리프 2세와의 조약에 따라 살인에 대한 속죄를 해야 했지만, 실행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부르고뉴파와 갈리카니즘을 표방하는 알마냐크파 간의 내전 상태였고, 양측은 국왕과 왕족 확보 및 파리 지배를 놓고 다투었다. 1415년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는 이를 기회로 프랑스를 침공,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고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샤를은 형이 있었으나, 왕세자( 도팽 ) 루이가 1415년에, 뒤를 이은 왕세자 장도 1417년에 사망했다. 새로 왕세자가 된 샤를은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장악하자 프랑스 남부 부르주로 도망쳤다. 1438년 7월, 샤를 7세는 부르주에서 갈리카니즘에 기반한 「부르주 국사조서」를 발표했다.
1419년 왕세자 샤를과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용맹공)는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협상했으나, 협상 자리에서 왕세자 지지자가 용맹공을 암살했다. 뒤를 이은 필리프 3세(선량공)는 잉글랜드와 동맹, 트루아 조약을 맺고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 조약은 왕세자 샤를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고, 샤를 6세 사후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샤를 7세의 어머니 이자보는 샤를이 왕의 친자가 아니라고 암시했고, 샤를은 자신의 정통성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2. 3. 트루아 조약 (1420)
1420년 5월 21일 샤를 6세가 서명한 트루아 조약에 따라, 프랑스 왕위는 헨리 5세 또는 그의 상속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헨리 5세는 1422년 7월 사망했고, 그의 상속자는 헨리 5세와 샤를 6세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잉글랜드의 헨리 6세였다. 하지만 발루아 왕가에 충성하는 프랑스인들은 강압과 샤를 6세의 정신 능력 약화를 이유로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다.[1] 이들은 도팽 샤를의 적법한 출생을 믿고 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여겼다.[1]1419년 왕세자 샤를과 부르고뉴 공 장 1세(용맹공)는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공동으로 싸우기 위해 화해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협상 자리에서 왕세자 지지자가 용맹공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뒤를 이은 필리프 3세(선량공)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왕세자 샤를과 전면적으로 대립하여 트루아 조약을 체결,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 이 조약은 왕세자 샤를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고, 샤를 6세 사후에는 샤를 6세의 딸 카트린(캐서린)을 왕비로 맞은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다는 내용이었다.[1]
2. 4. 부르주 왕
젊은 시절 샤를은 용감하고 화려한 지도력으로 유명했다. 도팽이 된 후 그는 가문을 상징하는 빨강, 흰색, 파랑색 옷을 입고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으며, 그의 문장은 맨손으로 칼을 잡은 갑옷을 입은 주먹이었다.[1] 1421년 6월 25일, 그는 갈라르동을 함락시키고 반역자로 간주하여 수비대를 처형했으며, 6월 말까지 샤르트르를 포위했다.[1] 그는 아라곤의 요란드의 보호 아래 루아르 강 남쪽으로 이동했고, 1422년 12월 18일에는 앙주의 마리와 결혼했다.[1]샤를은 스스로 프랑스 국왕이라는 칭호를 주장했지만, 북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낼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2] 대신 그는 루아르 강 남쪽에 머물렀고, 쉬농소와 같은 성에서 순회하는 궁정을 유지했다. 그는 여전히 관습적으로 "도핀"으로 알려졌거나, 거주했던 도시 이름을 따서 조롱하는 의미로 "부르주 왕"으로 불렸다.[2] 그는 주기적으로 이베리아 반도로 도피하는 것을 고려했는데, 이는 잉글랜드가 프랑스 점령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2]
1415년 헨리 5세가 프랑스에 침공하여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고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샤를에게는 형이 있었으나, 왕세자(도팽)였던 루이가 1415년에, 뒤를 이어 왕세자가 된 장도 1417년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새롭게 왕세자가 된 샤를은, 곧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장악하자 프랑스 남부 부르주로 도망쳤다. 후에 1438년 7월, 이 부르주에서 샤를 7세는 갈리카니즘에 기반한 「부르주 국사조서」를 발표했다.
1419년 왕세자 샤를과 부르고뉴 공 장 1세(용맹공)는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공동으로 싸우기 위해 화해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협상 자리에서 왕세자의 지지자가 용맹공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뒤를 이은 필리프 3세(선량공)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왕세자 샤를과 전면적으로 대립하여 트루아 조약을 맺고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
1422년 헨리 5세가 급사하고 샤를 6세도 사망하자,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다. 한편, 샤를 7세도 아르마냐크파의 지지 아래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것을 선포했지만, 부르고뉴파는 이를 부정했고, 샤를 7세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할 수 없었다. 그는 아르마냐크파 이외의 세력으로부터는 여전히 왕세자, 또는 경멸적으로 "부르주의 왕"이라고 불렸다.
2. 5. 오를레앙 공방전
1428년 10월, 잉글랜드는 부르고뉴파와 다시 동맹을 맺고 알마냐크파의 거점이었던 오를레앙을 포위했다(오를레앙 공방전). 이곳을 함락시키면 프랑스 남부로 침공할 수 있었지만, 1429년 5월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잉글랜드군은 오를레앙 포위를 풀고 후퇴해야 했다.잔은 1430년 5월 24일 콩피에뉴 공방전에서 룩셈부르크의 장이 이끄는 부르고뉴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부르고뉴인들은 그녀를 잉글랜드 동맹국에 넘겨주었다. 오랫동안 잉글랜드 점령 정부에 봉사했던 피에르 코숑과 같은 친(親)잉글랜드 성직자들로 구성된 법정에서 이단으로 재판을 받은 그녀는[1] 1431년 5월 30일 화형당했다.
2. 6. 즉위 과정
영국과의 백년전쟁이 계속되던 당시, 샤를은 오를레앙에서 잉글랜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정식 국왕이 아니었다. 백년전쟁 시기는 가장 치열했던 전쟁 시기였기에 즉위식을 거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다른 지방 영주들 또한 잉글랜드군과 대치 중이어서 구원군을 보내기 어려웠다.그때 샤를은 잔 다르크라는, 프랑스를 구할 성녀가 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의심이 많았던 샤를은 잔 다르크를 시험하기 위해 하인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고 자신은 하인의 옷을 입고 숨었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알현이 시작되자마자 왕의 복장을 한 하인을 보지 않고 샤를에게 다가와, 성모 마리아로부터 파리로 돌아가 정식으로 왕위에 즉위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전했다. 그제서야 샤를은 잔 다르크를 믿게 되었다.
알현 직후 샤를은 잔 다르크에게 지방 영주들로부터 오를레앙을 구원할 군사를 이끌고 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오를레앙 사수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군은 오랜 싸움으로 무기가 망가지고 활도 떨어진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오를레앙이 포위되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그때 잔 다르크가 구원군을 이끌고 나타나 잉글랜드군을 물리치고 샤를을 구출했다.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을 재탈환하고 프랑스군 사기가 높아지자, 샤를은 비로소 프랑스 왕으로 정식 즉위했다. 샤를은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1422년, 헨리 5세가 뱅센 숲에서 급사했다. 샤를 6세도 같은 해 10월 21일에 사망했고, 프랑스 왕위는 전년에 헨리 5세와 카트린 사이에서 태어난 헨리 6세가 잉글랜드 왕위와 함께 계승하게 되었다(단,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한 것은 1431년이었다). 한편, 샤를 7세도 아르마냐크파의 지지 아래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것을 선포했지만, 부르고뉴파는 이를 부정했고, 샤를 7세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할 수 없었다. 그는 아르마냐크파 이외의 세력으로부터는 여전히 왕세자, 또는 경멸적으로 "부르주의 왕"이라고 불렸다.
한편, 잉글랜드는 부르고뉴파와 다시 동맹을 맺고, 1428년 10월에는 아르마냐크파의 거점이었던 오를레앙을 포위했다(오를레앙 포위전). 이곳을 함락시키면 프랑스 남부로 일거에 침공할 수 있었지만, 1429년 5월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잉글랜드군은 오를레앙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그리고 6월 파테이 전투에서 잔 다르크 등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을 연달아 격파하였고, 7월 17일, 샤를 7세는 랭스로 가서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2. 7. 잔 다르크와의 갈등
샤를 7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잔 다르크에게 오를레앙을 지키고 잉글랜드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잔 다르크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였다.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세가 유리해지자, 샤를 7세는 평화협정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가 항복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샤를 7세의 의견에 반대했다. 샤를 7세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잔 다르크를 점점 걸림돌로 여겼고, 심지어 잔 다르크가 자신의 지시 없이 적진을 공격하는 행동이 계속되자 분노가 커졌다. 샤를 7세는 전쟁을 여러 번 치르면서 싸움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430년, 오를레앙이 잉글랜드군에게 함락되고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잉글랜드는 샤를 7세에게 몸값을 요구했지만, 샤를 7세는 많은 승리를 안겨준 잔 다르크를 몸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매몰차게 버렸다. 결국 잔 다르크는 1431년 5월 잉글랜드에서 마녀라는 혐의로 화형을 당했다.[3]
샤를 7세가 잔 다르크를 방치하여 죽게 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정치적으로 미숙하여 측근들에게 세뇌당했다는 설, 잔 다르크를 이용만 하고 버렸다는 설, 잔 다르크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샤를 드 오를레앙[1], 라 이르 즉 에티엔 드 비뉴르[2]와 같이 몸값을 지불하여 구출한 인물도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몸값을 지불하고 싶지 않아서 잔 다르크를 방치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안토니오 모로시니의 연대기에 따르면, 샤를 7세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특사를 보내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군에 넘길 경우, 포로로 잡혀 있는 부르고뉴파에게도 동일한 취급을 하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3] 이것이 사실이라면 샤를 7세가 잔 다르크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2. 8. 종전
잔 다르크가 화형당한 후, 샤를 7세는 그녀의 주장대로 잉글랜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전투를 계속했다. 크레시 전투, 칼레 전투,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여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다. 잉글랜드군이 수세에 몰리고 영토 대부분이 회복되어 전세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샤를 7세는 평화협정에 힘썼다. 마침내 1456년 잉글랜드와 평화협정을 맺고 백년전쟁을 종식시켰다. 프랑스인들은 샤를 7세를 승리왕이라고 불렀다.1435년 샤를 7세는 아라스 조약을 통해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화해하고,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이는 헨리 6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1]
이후 20년 동안 프랑스는 파리를 탈환하고,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을 회복했다.[2]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기옌을 탈환함으로써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 대부분을 탈취하고, 백년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3]
2. 9. 말년
전쟁이 끝난 뒤 샤를 7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복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몇몇 귀족들이 전쟁을 빌미로 반란을 일으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이를 진압하여 왕권 강화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이 끝난 뒤 5년 뒤인 1461년에 생을 마감했다. 오랜 전쟁과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인 나머지 몸이 쇠약해진 것이다.샤를 7세의 말년은 상속자인 루이와의 적대적인 관계로 특징지어진다. 루이는 도핀으로서의 지위에 걸맞는 실질적인 권력을 요구했지만, 샤를은 끊임없이 거부했다. 이에 따라 루이는 반대를 선동하고 음모를 꾸며 아버지의 통치를 불안정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는 아버지의 정부인 아녜스 소렐과 다투었고, 어떤 기록에 따르면 칼을 뽑아들고 그녀를 샤를의 침실로 몰아넣기도 했다. 결국 1446년, 샤를이라는 이름의 막내아들이 태어난 후, 왕은 도핀을 도피네로 추방했다.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 후 루이는 궁정으로 돌아오라는 왕의 요구를 거부했고, 결국 1456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1]
1458년 샤를은 병이 들었다. 다리에 생긴 종기(아마도 초기 증상으로 당뇨병 또는 다른 질병일 가능성이 있음)가 낫지 않았고, 감염으로 심한 열이 났다. 왕은 부르고뉴 망명 중이던 루이를 불렀지만, 도핀은 오기를 거부했다. 그는 점성가들을 고용하여 아버지의 사망 시각을 예측하게 했다. 왕은 다음 2년 반 동안 점점 병들어 갔지만,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반역적인 봉신 아르마냐크의 장 5세의 사건도 처리해야 했다.[2]
그러나 마침내 1461년 7월, 왕의 의사들은 샤를이 8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병들고 지친 왕은 헛소리를 하며, 자신이 아들에게 충성하는 배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확신했다. 병과 열의 압박 속에서 그는 미쳐버렸다. 이제 턱의 또 다른 감염으로 입에 농양이 생겼다. 이로 인한 부기가 너무 커져서, 생애 마지막 주에는 음식이나 물을 삼킬 수 없었다. 그는 도핀에게 임종 자리에 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루이는 거부하고 부르고뉴의 아베느에서 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렸다. 메종쉬르에브르에서 막내아들 샤를의 간호를 받으며 장남의 최후의 배신을 알게 된 왕은 굶어 죽었다. 그는 1461년 7월 22일에 사망하여 그의 요청에 따라 부모 곁 생드니에 묻혔다.[3]
1456년에는 잔 다르크 복권 재판을 열어 잔 다르크의 명예를 회복하려 했다. 그 후에는 백년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내의 복구에 힘썼으며, 재정 재건, 관료 조직 정비, 왕국 상비군 창설 등을 실시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아들 루이 11세와의 대립에 시달리다가 1461년 7월 22일에 사망했다. 한편으로는 아들과의 다툼에서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식사를 거부하고 굶어 죽었다는 설도 있다.[4]
3. 잔 다르크 명예 회복 사업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잔 다르크가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면서 샤를 7세의 정통성에도 문제가 생겼다. 잔 다르크가 마녀로 남게 되면 샤를 7세는 교황청이 이단으로 규정한 인물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된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11]
이에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명예 회복을 통해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의 화형을 명분 삼아 헨리 6세의 대관식을 거행하며 샤를 7세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적이 있었다.[12] 샤를 7세는 이러한 잉글랜드의 주장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교황청은 과거의 결정을 번복해야 했기에 샤를 7세의 재심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어머니를 통해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고, 잔 다르크를 재판했던 판사들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여 재심을 진행시켰다.[13]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잔 다르크의 혐의에 대한 재조사 및 종교재판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1452년 조사가 시작되었고, 1455년 11월 공식적인 항소가 제출되었다. 유럽 전역의 성직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115명의 증인들의 증언과 증거자료를 분석하였다. 1456년 6월, 잔 다르크는 순교자로 선언되었고, 피에르 코숑 주교는 이단자로 규정되었다. 1456년 7월 7일, 잔 다르크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14]
3. 1. 재심의 정치적 의도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즉위할 수 있었던 샤를 7세는 종전 후 잔 다르크의 명예 회복 사업을 진행했다. 잔 다르크가 계속해서 마녀로 남아 있을 경우 샤를 7세의 정통성에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진행된 사업이었다. 지난 시절 잔 다르크에 대해 행해졌던 종교재판은 교황청의 공식적인 승인하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샤를 7세는 교회가 마녀로 규정한 악마와 동맹을 맺고 그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 될 수밖에 없었다.[11] 따라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복권시킴과 동시에 다시 한번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정통성과 명분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가 이단으로 화형된 후 이를 명분으로 샤를 7세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며 1431년 12월에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잉글랜드 헨리 6세의 대관식을 거행한 적이 있었다.[12] 이를 의식한 샤를 7세는 향후 잉글랜드에서 제기할 수 있는 정통성 시비에 대비한 예비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그러나 교황청은 샤를 7세의 재심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잉글랜드가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에 교회가 내렸던 결정을 다시 뒤집어야 했기에 교황청의 입장은 난처했다. 곤경에 빠진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어머니로 하여금 교황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여 사안을 비정치화하는 외교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또한 과거의 종교재판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재판장 코숑 주교, 종교 재판소의 대표 장 르메트르, 종교 전문가 장 에스티베 등 잔 다르크를 재판했던 판사들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여 재심 진행을 관철시켰다.[13]
3. 2. 재심과 명예 회복
교황 갈리스토 3세는 대심문관 장 브레알과 잔 다르크의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 잔 다르크의 혐의에 대한 재조사 및 종교재판을 실시한다고 포고하였다. 재심의 목적은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판결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는 1452년 시작되었으며, 기욤 부유 신부가 조사관을 맡았다. 공식적인 항소는 1455년 11월에 제출되었다.항소에는 유럽 전역의 성직자가 대거 참여하였으며, 교회법에 따른 표준 법정 절차가 준수되었다. 신학자로 전원 구성된 배심원들은 115명의 증인들의 증언 및 증거자료들을 비교 분석하였다. 대심문관 브레알은 1456년 6월 마지막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잔 다르크를 순교자로 선언하고, 피에르 코숑 주교에 대해서는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무죄한 여인을 죄인으로 몰아간 이유를 들어 이단자라고 선언하였다. 1456년 7월 7일 항소심에서 잔 다르크의 모든 혐의에 대해서 무죄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14]
4. 평가
샤를 7세는 백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프랑스를 재건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통치 초기에는 우유부단함과 무능함이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프랑스 왕국 역사상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4]
그는 그의 조상 4대(아버지 샤를 6세, 할아버지 샤를 5세, 증조부 장 2세, 고조부 필리프 6세)가 이루지 못한 잉글랜드를 몰아내고 백년전쟁을 종식시켰다. 로마 시대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 상비군을 창설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는데,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저서 『군주론』에서 샤를 7세의 상비군 정책을 칭찬하며, 그의 아들 루이 11세가 이 정책을 계속했다면 프랑스는 무적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샤를 7세는 부르주 프라그마틱 칙령을 통해 교황권으로부터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고, 1432년 푸아티에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내정에도 힘썼다. 그의 정책은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었다.[4]
그러나 잔 다르크를 버린 것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잔 다르크를 방치하여 죽게 했다는 점은 아직까지 그 이유가 불명확하며, 그가 잔 다르크의 강경한 태도에 부담을 느꼈거나 정치적 판단 미숙으로 인해 잔 다르크를 구출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4. 1. 잔 다르크를 버린 것에 대한 비판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방치하여 죽게 했다는 점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불명확하다.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전세가 자신에게 기울었다고 판단하여 평화협정에 몰두하고자 했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가 항복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샤를 7세의 의견에 반대했다. 샤를 7세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잔 다르크를 걸림돌로 여겼고, 잔 다르크가 자신의 지시 없이 적진을 공격하는 행동을 하자 분노가 커졌다. 그는 전쟁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430년, 오를레앙이 잉글랜드군에게 함락되고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히자, 잉글랜드는 샤를 7세에게 몸값을 요구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몸값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잔 다르크를 버렸다. 결국 잔 다르크는 1431년 5월 잉글랜드에서 마녀 혐의로 화형당했다.
샤를 7세가 잔 다르크를 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샤를 7세가 정치적으로 미숙하여 잔 다르크를 달가워하지 않는 측근들에게 세뇌당했다는 설, 잔 다르크를 이용만 하고 쓸모없다고 여겨 내쳤다는 설, 잔 다르크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샤를 드 오를레앙[1], 라 이르 즉 에티엔 드 비뉴르[2] 등 다른 인물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구출한 적이 있기에, 단순히 몸값을 지불하고 싶지 않아 잔 다르크를 방치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안토니오 모로시니의 연대기에 따르면, 샤를 7세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특사를 보내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군에 넘길 경우, 왕세자 측에 포로로 잡혀 있는 부르고뉴파에게도 동일한 취급을 하겠다는 협박을 했다고 한다.[3]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돕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을 가능성도 있다.
4. 2. 백년전쟁 종식과 프랑스 재건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화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잉글랜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받아들여, 영국과의 전투를 계속하였다. 크레시 전투, 칼레 전투,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여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다. 잉글랜드군이 수세에 몰리고 영토 대다수가 회복되어 전세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그는 평화협정에 전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1456년 잉글랜드와 평화협정을 맺고 백년 전쟁을 종식시켰다. 프랑스인들은 샤를 7세를 승리왕이라고 부른다.전쟁이 끝난 뒤 샤를 7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복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몇몇 귀족들이 전쟁을 빌미로 반란을 일으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이를 진압하여 왕권 강화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이 끝난 뒤 5년 뒤인 1461년에 생을 마감했다. 오랜 전쟁과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인 나머지 몸이 쇠약해진 것이다.
샤를 7세는 백년 전쟁으로 황폐해진 프랑스를 재건한 공적이 있다.[4] 그는 그의 조상 4대(아버지 샤를 6세, 할아버지 샤를 5세, 증조부 장 2세, 고조부 필리프 6세)가 실패한 일, 즉 잉글랜드를 몰아내고 백년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샤를 7세는 로마 시대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의 상비군을 창설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그의 아들 루이 11세가 이 정책을 계속했더라면 프랑스는 무적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샤를 7세는 부르주 프라그마틱 칙령을 통해 교황권으로부터 자신의 권력을 확보했다. 그는 또한 1432년 푸아티에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그의 정책은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단순한 목녀였던 잔 다르크를 기용하여 위기 상황에서 승리로 백년 전쟁을 종결시킨 공적에도 불구하고, 희곡이나 창작물에서는 어리석은 국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원래 공동으로 싸워야 할 존재였던 장 무서운 공작을 암살하여 부르고뉴파를 적대시하거나, 잔 다르크가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부르고뉴파의 손에 넘어갔을 때, 많은 몸값을 아끼며 방치해 버린 영향으로 보인다.
4. 3. 총괄
샤를 7세의 업적은 잔 다르크의 행적과 순교에 가려 빛을 잃었고, 그의 초기 통치는 때때로 우유부단함과 무능함으로 점철되었지만, 그는 프랑스 왕국의 역사상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그의 조상 4대(아버지 샤를 6세, 할아버지 샤를 5세, 증조부 장 2세, 고조부 필리프 6세)가 실패한 일, 즉 잉글랜드를 몰아내고 백년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다.샤를 7세는 로마 시대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의 상비군을 창설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저서 『군주론』에서 아들 루이 11세가 이 정책을 계속했더라면 프랑스는 무적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샤를 7세는 부르주 프라그마틱 칙령을 통해 교황권으로부터 권력을 확보했다. 그는 1432년 푸아티에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그의 정책은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단순한 목녀였던 잔 다르크를 기용하여 위기 상황에서 승리로 백년전쟁을 종결시킨 공적에도 불구하고, 희곡이나 창작물에서는 어리석은 국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공동으로 싸워야 할 존재였던 장 무서운 공작을 암살하여 부르고뉴파를 적대시하거나, 잔 다르크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음에도 부르고뉴파의 손에 넘어갔을 때, 많은 몸값을 아끼며 방치해 버린 영향으로 보인다.
하지만 샤를 7세가 백년전쟁으로 황폐해진 프랑스를 재건한 공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프랑스 왕국을 클로비스 1세 이래라고 할 만큼 평화롭고 정의와 질서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루이 12세까지의 연대기 요약, 파리 국립 도서관 소장 프랑스어 사본 제4954호 참조)[4]
참조
[1]
서적
ジャンヌ・ダルク
東京書籍
[2]
서적
ジャンヌ・ダルク
東京書籍
[3]
서적
ジャンヌ=ダルクの百年戦争
清水書院
[4]
서적
ジャンヌ・ダルク
東京書籍
[5]
웹사이트
샤를 7세 [Charles VII] - 잔 다르크의 출현과 백년전쟁의 종식
https://terms.naver.[...]
[6]
웹사이트
샤를 7세 [Charles VII]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7]
서적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
푸른역사
[8]
서적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휴머니스트
[9]
웹사이트
샤를 7세 [Charles VII] - 잔 다르크의 출현과 백년전쟁의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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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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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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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휴머니스트
[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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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역사
[14]
웹사이트
Nullification trial sentence rehabilitation
http://www.stjo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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